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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추천 <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 리뷰 (구조, 캐릭터, 메시지)

by 1000eok 2025. 5. 6.

1999년 개봉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류승완 감독의 데뷔작으로,

한국 독립영화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알린 문제작입니다.

날것의 폭력, 무질서한 사회,

그리고 무기력한 청춘을 통해 한국 사회의 밑바닥 현실을 여과 없이 담아낸 이 영화는 단순한 액션물이 아닌,

구조적으로 실험적이며, 캐릭터 중심의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강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본 글에서는 이 영화를 구성, 캐릭터 분석, 사회적 메시지라는 세 축으로 깊이 있게 살펴봅니다.

구조 분석: 옴니버스식 서사의 실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기존 한국 상업영화들과는 차별화된 옴니버스 서사 구조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네 개의 에피소드—<룰루랄라>, <안개>, <차례차례 스물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은 독립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서로 느슨하게 연결된 인물과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치 한 도시의 하층민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어딘가 얽혀 있는 현실을 반영한 듯한 방식입니다. 에피소드들은 구조상 시간적·공간적 배경이 중첩되면서 하나의 거대한 사회 단면을 구성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우리 사회 속의 어디쯤에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을 것 같다'는 현실감을 부여합니다. 영화는 명확한 기승전결보다는 인물 중심의 감정 흐름과 사건의 파편성에 집중하며, 이는 당시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전개 방식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앞선 세 편의 이야기들을 종합하면서, 분노와 폭력, 청춘의 좌절이 폭발하는 클라이맥스를 이룹니다. 이러한 서사 구조는 시청각적 자극과 현실적 리얼리즘이 결합된 파격적인 시도를 보여주며, 독립영화만이 가능한 표현의 자유와 창작자의 의도를 고스란히 전달합니다.

캐릭터 분석: 폭력에 잠식된 청춘들

이 영화의 진짜 힘은 인물들, 특히 그들의 '폭력의 이유'에 있습니다. 각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밀려난 인물들이며, 그들의 행동에는 저마다의 사연과 억눌린 감정이 존재합니다. 대표적으로 류승완 감독 본인이 연기한 '상환'이라는 인물은 폭력에 중독된 인물로, 사회가 제공하지 않는 정의를 자신의 방식으로 실현하려는 왜곡된 욕망을 드러냅니다. 상환은 정의감과 파괴 본능이 공존하는 인물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의 전환이 자연스럽게 묘사됩니다. 그는 경찰 아버지에 대한 반감,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 친구와의 갈등 등 여러 요소에 의해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인물이며, 이는 단순히 '나쁜 청년'으로만 볼 수 없는 복합적 캐릭터입니다. 또한, 각 단편에서 만나는 청춘들은 대체로 소외되고 무력하며, 폭력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범죄에 뛰어드는 순간에도 자신들이 잘못됐다는 인식보다는, 세상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감정에 더 사로잡혀 있으며, 이 점에서 영화는 인간의 폭력성을 일종의 '사회적 산물'로 다루고 있습니다. 류승완 감독은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폭력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 속에서 피어나는 사회적 증상"이라는 메시지를 시사하고 있으며, 각 캐릭터가 처한 맥락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보통 비난하던 범죄자들이 과연 처음부터 악인이었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메시지: 폭력의 원인과 사회 구조에 대한 통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단순히 하층민의 삶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왜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사회가 만들어낸 폭력’입니다. 다시 말해, 폭력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출되는 부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제도권 바깥에 있으며, 보호받지 못하고,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폭이 극히 좁습니다. 교육, 가정, 경제력, 법적 보호 등 그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이들은, 결국 자기 방어 수단으로써 폭력을 택하게 됩니다. 영화는 그러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폭력을 비난하기보다는 그 배경을 조명합니다. 또한 이 영화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에서 벗어나, 모호한 도덕성과 현실적 딜레마를 강조합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명확히 말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인물이 그 나름의 논리와 아픔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관객에게 판단의 책임을 넘기는 방식이며, 그만큼 성찰을 유도하는 메시지가 강렬합니다. 결국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으로, 화려하진 않지만 정직하고, 날카롭고, 지극히 인간적인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지금도 회자되는 이유는, 시대를 앞서간 메시지와 창작자의 날 선 시선 덕분입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단순한 폭력 영화가 아닙니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그것에 갇힌 청춘들의 현실을 진지하게 마주한 작품으로, 한국 독립영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폭력의 본질’과 ‘청춘의 비극’을 성찰할 수 있으며, 단 한 번의 관람이 아닌 여러 번 곱씹을수록 깊이가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지금이라도 꼭 다시 한 번 감상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